글. 홍성연
2023년 10월 패션계는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션 맥기르(Sean McGirr)가 선정되면서 들썩였습니다. 그의 채용이 이슈가 된 것은 맥퀸에서 26년간 근무했던 사라버튼(Sarah Burton)이 떠난 자리에 그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프랑스의 패션 대기업 Kring에 소속된 모든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백인 남자가 되면서 패션계에서는 왜 결국 높은 자리는 백인 남성들이 차지하는지 질문하고 있습니다. 정말 대대로 성공한 패션 대기업의 디자이너들은 백인 남성들이였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으로 파리 패션의 여왕 잔느 파퀸(1869~1936)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쟌느 파퀸(Jeanne Paquin)과 그녀의 남편 이시도르 파퀸(Isidore Paquin)은 1891년 파리 3, rue de la Paix에 파퀸 하우스를 설립합니다. 패션디자이너였던 쟌느가 디자인을 담당하고 남편이 사업을 관리하기로 합니다. 초기에 그녀는 우아하고 로맨틱한 이브닝드레스를 디자인하였고 파스텔색을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검정색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검은색은 죽음과 그에 대한 애도의 색으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검정색과 밝은색(특히 빨강색)을 조합하여 사용하고, 특히 선명한 색상의 안감이나 트리밍으로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그녀는 1907년 남편이 45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대부분의 시간에 검정색옷을 입기 시작하면서 검정색은 그녀의 패션에 빠질 수 없는 색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그녀의 작품들은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혁신적이고 현대적이라고 평가되어집니다. 당시 과거부터 이어져오던 상류층 문화에 따라 여성들은 오후에 사교행사, 가든파티, 오후 결혼식 등 시간과 장소에 따라 여러 가지 의상을 갈아입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변화한 시대에 불편한 활동적인 여성들을 위해, 그녀는 오후와 저녁 모두 입을 수 있는 드레이프가 달린 드레스를 입고 간단한 악세사리를 변경해서 다른 느낌을 주도록 제안합니다. 또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호블스커트는 여성의 움직임을 제약하는 디자인 이였습니다. 쟌느는 이에 숨겨진 주름을 넣어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활동하기 편한 스커트를 만들어냅니다. 이국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기모노, 러시아 발레 등 이미지를 자신에 디자인에 더했습니다. 러시아 디자이너인 레온 바크스트(Léon Bakst)과 함께 디자인한 무대의상은 당연한 수순으로 보입니다.
왼쪽 위부터] 파퀸의 옷을 입은 여배우 Melle Vincourt, Le Figaro-Modes: 도시, 극장, 장식 예술, 1915 / 볼 가운(1895),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 진한 자주색 벨벳 이브닝 슈트(1890년대후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 금색 트리밍이 있는 검정 벨벳 자켓(1890),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 George Barbier(1912-1913), 오페라코트, Gazette du Bon Ton/ 파퀸의 오페라 코트(1912),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러시아 발레를 위한 Bakst디자인 파퀸이 작업한 의상(1912)/ Léon Bakst와 콜라보레션한 이브닝 드레스(1912)
그녀는 1900년 파리에서 다섯 번째로 개최되는 만국박람회의 패션 부문 의장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특이한 이력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콩코르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에 있는 높이 45m의 만국박람회 기념문 꼭대기에 폴 모로-보티에(Paul Moreau-Vauthier)가 조각한 동상 "라 파리지엔느(La Parisienne)"가 세워집니다. 파리의 여성이란 뜻의 그 동상은 사람들이 생각한 아름다움과 상당히 달랐기에 등장부터 많은 논란을 야기했습니다. 당시의 아름다운 여성상이라고 하면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여성상과 같은 고전을 떠올리는데 라 파리지엔느는 대담한 모습에 파퀸의 현대적인 드레스와 롱 코트를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언론은 예상과 다른 파리의 여성상을 두고 너무나도 거만하다며 시크함과 우아함의 합성인 파리지엔느의 "본질"을 포착하지 못했다고 혹평을 쏟아 냅니다. 반대로는 그 진실성과 유사성은 감탄하며 20세기 파리시의 완성된 조각상으로 미래를 위한 새로운 예술의 시작이라며 찬성하는 사람들도 생겨납니다. 이러한 논란을 유명세를 떨친 파리지엔느는 파리 사람들에게 결국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녀는 아쉽게도 6미터에 달하는 크기와 장기보관이 쉽지 않은 소재를 사용해 공공장소에 배치할 수 없었기에 만국박람회가 끝나고 파리의 한 고철상에게 팔립니다. 결국 1901년 몇 달 동안 그녀는 파리사람들이 그녀가 해체되는 것을 바라보는 가운데 생을 마감합니다.
왼쪽부터] 라 파리지엔느가 올라간 만국박람회문 / 라파리지엔느의 측면과 정면
여러 가지로 유명세를 떨치던 그녀는 홍보를 위해 자신의 의상을 입은 모델을 오페라나 경마와 같은 공개 행사에 보낸 최초의 디자이너기도 합니다. 해외 고객유치를 위해 그녀는 모델들을 데리고 미국 동부투어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다양한 연예계 스타들과 예술가들뿐만이 아니라 스페인, 벨기에, 포르투갈의 여왕들, 미국의 록펠러나 밴더빌트 가문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품질을 존경하는 독일과 일본의 여성들까지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1896년에 런던에 매장을 열고 후대 유명한 디자이너 마들렌 비오네(Madeleine Vionnet)가 고용되었습니다. 1912년는 뉴욕 5번가에 모피 전용 부티크를 열고, 마드리드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도 새로운 지점을 열어 세계에 매장을 가진 첫 디자이너가 됩니다. 국제적인 사업적으로 성공한 파퀸하우스는 전성기에 직원을 최대 2700명까지 고용했는데 당시 다른 하우스의 고용인원이 최대 400명정도였다는 것을 보면 그녀의 성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습니다. 1912년에 Léo Lelièvre가 만든 프랑스 샹숑 La biaiseuse 노래에는 파퀸의 패션 하우스가 가사가 들어갑니다. 이 노래는 지금까지 여러 명의 아티스트에 의해서 리메이크되고있는 고전곡입니다.
왼쪽 위부터] Jean Béraud(1907) 'La Rue de la Paix' 그림에서 오른쪽에 파퀸 하우스가 보인다 /옆서(1910) PAQUIN과 MARINDAZ 하우스:3 RUE DE LA PAIX, 파퀸 하우스 앞에 직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있다/ Henri Gervex(1906). 파퀸에서 5시간(Five Hours at Paquin), 중앙에 쟌느가 왼쪽 뒤에 이사도르가 있다. / Isaac Israels(1865-1934), 파리의 파퀸작업장(Studio Paquin, Paris)
그녀는 1913년 국가훈장인 Legion of Honor를 받은 최초의 여성재봉사가 되었고, 패션 비즈니스를 창안한 여성, 검정색을 일상복에 최초로 사용한 디자이너, 여성을 위한 현대적 의상개혁가 등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게 됩니다. 그녀는 사업가로써 일찍이 대중교육의 발전을 위한 Cité 대학을 위한 기부, Saint-Cloud 보조 병원 관리 지원, 의료 서비스에 구급차 6대 기부, 알코올 중독 퇴치 지원 등 수 많은 자선 활동에 참여하였습니다. 직원 복지를 위해 다양한 지역에서 800명의 직원들과 함께하는 연회 행사를 하는가 하면, 직원들이 휴가를 보낼 수 있도록 남편과 함께 도시 외곽에 호화로운 빌라를 구입합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 동안인 1917년부터 1919년까지 양재연합회의소(Chambre Syndicale de la Couture)의 회장을 역임한 최초의 여성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녀는 1917년 패션 산업 노동자들이 파리에서 파업을 벌였을 때 그들의 편에 서있었습니다. 다른 패션기업가들은 그녀가 자신과 같은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급여 요구와 임금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가한다며 그녀를 비난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사망 후 홀로 하우스를 이끌어오던 사업에서 1920년에 은퇴를 결정합니다. 이후 그녀가 없어서 일까 여러 명의 디자이너의 노력에도 결국 1956년 심각한 재정적난으로 인해 아쉽게도 문을 닫게 됩니다. 그녀의 브랜드는 현대에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지만 후대의 여성 디자이너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여전히 여성의 활동을 생각하고 시대를 읽어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사람으로 성공한 여성 디자이너 겸 사업가로 남았습니다.
[참고문헌]
Katherine Joslin(2009), Edith Wharton and the Making of Fashion, UPNE. pp.126-127
https://gallica.bnf.fr/blog/14052021/jeanne-paquin-premiere-reine-de-la-haute-couture-francaise?mode=desktop Anne Dymond(2011), Embodying the Nation: Art, Fashion, and Allegorical Women
at the 1900 Exposition Universelle, University of Lethbridge
Revue de presse (Retronews) : la Parisienne, une statue mal aimée:
[사진출처]
노래: La biaiseuse의 M P BELLE의 리메이크버전
[노래 가사는 이중의미를 담고 있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입니다. La biaiseuse는 양장점에서 일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발음이 비슷한 La baiseuse는 창녀를 뜻하며, 내용도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해석할 수 있는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