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연정
[1] 온 카와라(On Kawara 河原 温, 1933-2014), 백만년(ONE MILLION YEARS), 2009, 퍼포먼스, 사운드, 책, 가변크기, 데이비드 즈위너 갤러리, 뉴욕, 미국. 보고 보여지기 위해(TO SEE AND BE SEEN), 1972, 벽화, 가변크기, Solomon R. Guggenheim Museum, 뉴욕, 미국. © 2023 On Kawara. Photo: © Cathy Carver, courtesy David Zwirner.
온 카와라의 작품 <백 만년>은 기호를 사용하는 개념미술을 이해하기에 적합한 예시 중 하나다. 해당 작품은 <백 만년: 과거(1970-1971)>와 <백 만년: 미래(1980-1988)>로 구성되어 있는데, 1969년을 기준으로 과거의 백 만년과 미래의 백 만년을 타이핑한 것으로, 전자는 기원전 998,031년까지, 후자는 1,001,997년까지가 기록되어 있다. 각 10권의 가죽 바인더로 구성된 이 작품(총 20권), 한 페이지당 500년씩, 권 당 200페이지의 숫자를 타이핑하여 제작하였다. 작품의 구성은 이러하지만, 실현에서는 퍼포먼스와 함께 이루어 졌는데, 스튜디오, 혹은 부스에 앉은 남녀 둘은, 영어로 번갈아 가며 년도를 낭독하며, 짝수 년도는 여성이, 홀수 년도는 남성이 읽는다.
사실상, 1,000,000은 숫자의 1과 0의 숫자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 년, years가 붙게 되면, 시간의 방대한 이미지인 시간성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시간성은 인간존재와 만나 역사를 형성하고, 역사는 기록된 형태로써 현재의 시간에서 실존한다. 온 카와라가 해당 작품을 고안한 시기인 1969년은 작가 스스로의 실존의 의미를 나타내는 기호가 된다. 작가가 존재하였든 존재하지 않았든, 과거의 시간들은 지금의 작가가 존재하는 시점을 형성하였으며, 앞으로의 시간들의 기록은 그의 미래의 실존과 죽음의 존재를 입증한다. 사람은 살아있지 않으면 죽을 수 없으므로, 죽음은 역설적으로 한 때 살아있었다는 증명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백 만년: 미래>의 주제는 종합적 실존의 의미라 볼 수 있다. 해당 작품의 퍼포먼스에서는 번갈아 년도를 낭독하는 남녀가 출연하는데, 이는 아담과 이브, 즉 인간사 시작의 메타포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 실존이 증명되며, 관람객 또한 방대한 시간 내의 나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다른 관점의 해석을 제시해 볼 수 있다. ‘시간’은 인간의 존재와 관계없이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고, 이를 우리의 기준으로 명확하게 헤아리기 위해 부여한 것이 ‘년도’의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즉, 인간의 실존이 확인되는 것도 인간의 기준을 통해 확인이 되며, 여기에서는 그 기준으로 년도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년도, 날짜 개념은 일반적으로 시간을 헤아리기 위한 기호 뿐만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기호로 기능한다.
[2] 온 카와라(On Kawara 河原 温, 1933-2014), 1992년 1월 30일(JAN. 30. 1992), 1992, 골판지 상자에 신문 스크랩이 있는 캔버스, 25.4 x 33cm, 소더비즈 경매 2023년 5월 20일. 이미지 출처: https://www.sothebys.com/en/buy/auction/2023/contemporary-day-auction-2/jan-30-1992?locale=en
이는 날짜 그림(Date Painting)연작에서도 동일하다. 작가는 1966년 1월 4일 뉴욕에서 첫번째 날짜그림을 제작 한 후, 50여년 동안 112개의 도시를 돌아다니며 3천 개 가량의 작품을 완성하였다. 이 연작의 잘 알려진 이칭은 오늘(today)연작이다.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작품의 날짜 표기에 해당하는 날에 제작을 시작하여 완성되는 작품이다. 이 외에도, 날짜 표기 역시 작품이 제작 되는 곳의 표기 규칙을 따라 제작되었다. 한국의 날짜 표기 규칙은 ‘연. 월. 일.’이라면, 프랑스의 경우 ’숫자 일 문자 월 연’으로 표기한다. 따라서 해당 작품을 보고 대략적인 제작 위치를 알 수 있게 된다. 날짜 개념이 시간성과 공간성을 동시에 내포하여 더욱 강조된 실존의 기호로 표현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오늘 연작에는 ‘해당 작품이 실제 날짜의 자정까지 완성되지 않으면 즉시 파괴한다.’는 강한 규칙이 존재한다. 조형구성은 배경에 문자로 단순하게 보이지만, 매우 섬세한 작업과정을 거친 작품이기 때문에 긴 제작시간이 드는 작품 중 하나이다.
온 카와라는 1966년부터 1995년까지 읽다(I Read)를 제작하였는데, 이는 신문에 주석을 단 스크랩 북으로, 회색 바인더 세트로 구성되어 있다.(저작권 문제로 도판 제외) 신문 스크랩이기 때문에,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날짜 그림에 해당하는 년도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날짜 그림과 읽다를 함께 보았을 때, 날짜 그림이 가진 기호의 사회개념적 의미는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92년 1월 30일에 스크랩 된 신문의 내용은 아일랜드와 북한에 관한 정치적 이슈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날짜그림과 함께 해석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개념 미술이 조형적 요소를 통한 외관적 미감을 전달하는 것에 비중을 두는 것이 아닌, 사회맥락적 해석을 요구하는 개념 전달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합하여 해석해 본다면, 온 카와라에게 있어 실존의 기호란 육체가 특정한(기록된)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였음을 증명하는 기록, 그 이상으로, 전 세계적으로, 과거와 미래가 엮어 있는 역사적 공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복합적 기록인 것이다.
온 카와라가 이러한 실존을 자신의 주요 개념으로 다루게 된 계기는 유년시절에 일어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폭격, 전후 세대인 부모님의 삶의 방식으로 인한 불안과 상실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허무함의 원인이 무엇이고, 왜 이토록 불안한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인 것이다. 이것은 1950년대 일어난 아방가르드 계열의 실존적 물음과도 닮아 있어, 개념미술을 통해 실존에 대한 의문과 기록을 이어 나갈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쩌면 시대와 시절에 대한 연민인, 또는 소통인 그의 작품을 한 번 들여다 보는 것도 좋겠다.